산은 꼭 올라야 제맛인가 둘러 가면 크게 품을것을…
지리산에 총 300㎞ 도보길 놓인다 |
지리산.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곳은 거대한 ‘로망’입니다. 지리산은, 다른 산과는 달라서 한번 정상에 올랐거나 종주를 해봤다고 해서 ‘졸업’하는 산이 아닙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동서로 뻗은 주능선만 45km. 크고 작은 봉우리만 85개. 지리산 앞에 서면 어둑어둑한 새벽 성삼재에서 첫발을 내딛을 때의 긴장감과 세석산장에서의 쏟아질 듯한 별들과 함께 한 밤, 그리고 우의를 입고 청정한 숲을 걷던 걸음이 시도 때도 없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 장대한 산은 시도 때도 없이 피를 끓게 하고, 가슴을 두방망이질 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 지리산에 장거리 도보길(트레일·Trail)이 새로 놓입니다. 그 길은 지리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아닙니다. 멀찌감치 물러서 마을과 숲, 다랭이 논과 묵은 밭을 지나면서 지리산의 장엄한 능선을 바라보며 걷는 길입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지름길을 짚어 정상으로 향하는 그런 길이 아니라, 일부러 산자락을 에둘러서 돌아가는 그런 길입니다. 지리산을 종주하는 길이 조여진 수직의 길이라면, 새로 난 지리산 둘레길은 등정의 욕망을 버린 수평의 느슨한 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길은 이동이 목적이 아니고, 길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아직은 2개 구간 20.8km만 완성돼 있지만, 그 길은 앞으로 4년동안 지리산의 산자락을 돌며 300km를 이어 전남과 전북, 그리고 경남을 넘나들면서 5개 시와 16개 면, 50개 리의 100여개 마을을 지나게 됩니다. 길은 해발 50m부터 1100m까지 오르내린다는군요. 그 길에는 옛길도 있고, 고갯길도 있고, 숲길, 강변길, 논둑길, 마을길도 있습니다. 쉬지 않고 걷는다면 232시간. 하루 10km 안팎씩 걷는다면 32일 하고도 반나절이 더 걸리는 길입니다. 그 길의 첫머리에 들었습니다. 전남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매정마을. 그곳에서 지리산 도보길은 시작합니다. 여기서 전북 남원과 경남 함양을 잇는 등구재를 넘어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며 다랑논을 따라가는 10.7km의 길은 ‘다랭이길’이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 길에는 모내기를 앞두고 이제 막 물을 받기 시작한 다랑논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고, 울창한 숲과 아름드리 나무들로 그득했습니다. 다랑논은 대낮에도 개구리 울음소리로 가득하고, 묵은 밭에는 산짐승이 내려온 흔적도 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만난 습지에서는 퍼드덕 물오리떼가 날아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길을 걸어 당도한 산촌마을에는 이끼가 새파랗게 낀 돌담과 우람한 느티나무 당산목, 그리고 삽을 들고 논물을 보러 나온 촌로들이 있었습니다. ‘산사람길’이란 이름이 붙은 두번째 구간은 가파르게 지리산 북쪽 벽송사까지 치고 올라가서 능선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울울창창한 짙은 숲을 따라 능선에 당도하면 길은 이내 부드러워집니다. 깊은 숲에 집 한 채만 덜렁 있는 독가촌을 지나면 구불구불 임도를 따라 4가구가 사는 송대마을입니다. 조용한 산마을은 지리산 자락을 내려온 물소리로 가득합니다. 터덜터덜 걸어본 이 길에서는 사실 눈이 확 뜨일 만한 절경은 없습니다. 어찌 보면 지리산 길의 풍광은 누추하기 짝이 없습니다. 낭만적인 풍광을 기대하고 왔다면 십중팔구 실망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삶이란, 혹은 생활의 진솔한 풍경이란 본디 누추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이 길이 매력적인 것은 걷는 내내 지리산을 품 안에 가득 안을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산 마을에서 사람들이 사는 짙은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는 것 때문이기도 합니다. 반쯤 무너진 돌담과 녹슨 양철 지붕이 남아있고, 해질 무렵 저녁밥 짓는 연기의 구수한 내음도 있고, 노인들의 마른 기침소리도 있답니다. 선진국에는 장거리 도보길이 곳곳에 있습니다. 일본에는 도카이 보도라는 무려 1697km의 도보길이 있고, 독일에도 흑림지대에 트레일 슈발츠발트란 도보길이 있습니다. 스위스에도 루째른에서 시작하는 하이킹트레일이, 영국에도 템스 강변을 따라 내셔널 트레일이 있습니다. 이런 길들은 저마다 낭만적인 마을풍경과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도회지 생활에 지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트레일에 비하면 정취나 풍광은 빠질지는 몰라도, 지리산 트레일은 생활과 문화, 역사와 자연경관이 한데 어우러지는 복합적인 길입니다. 이런 길은 아직 아무데도 없지 싶습니다. 지리산에 깃들어 살아왔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는 길. 두번째 구간이 끝나는 송대마을쯤에서 ‘우리도 이런 길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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